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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와 정책 2019-19호] 홍콩 사태와 중국의 경제·정치 모순
2019년09월09일  월요일
조회수 : 349
김기수

홍콩 사태와 중국의 경제·정치 모순
 


김기수(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kskim@sejong.org 


1. 서언


무려
14주째 지속된 홍콩 사태가 95일을 기점으로 변곡점을 맞고 있다. 홍콩정부는 홍콩 민주화 시위의 단초였던 범죄인 인도법(송환법)’을 철회한다고 발표했다. 외형적으로는 홍콩 시민의 승리처럼 보이지만 홍콩 사태의 본질은 송환법 철회 여부를 벗어나 있다. 본질 문제의 해결이 없다면 홍콩 민주화 운동은 향후 반복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외형상 핵심 이슈로 부상한 송환법은 중국이 약속한 일국양제, 즉 자본주의 체제인 홍콩에 고도의 자치를 부여한다는 원칙의 실행과 연계돼 있다. 나아가 일국양제는 중국 본토의 경제 및 정치체제의 속성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그와 같은 복잡한 연계구도가 존재하기에 홍콩 사태의 본질이 송환법 철회 여부로부터 상당이 벗어나 있다고 보는 것이다
. 역으로 다음의 질문도 가능하다. 중국의 경제·정치 체제는 과연 고도로 발전된 홍콩의 자본주의 시스템을 수용할 수 있을까? 송환법 투쟁은 중국의 경제·정치 체제가 홍콩의 현실을 담아내기는 무리라는 현실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중국 경제·정치 체제의 본질은 무엇일까? 중국은 자신의 체제를 중국 특색 사회주의 시장경제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사회주의와 시장경제는 양립이 가능할까? 이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동거를 의미하는 일국양제를 수용할 수 있는 중국의 능력에 대한 질문과 맥을 같이한다.

 

 

2. 공산주의의 정치적 모순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공산주의의 경제적 결함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치적 모순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부각된 적은 별로 없다. 공산주의 이론을 기술한 원전 어디에도 공유경제의 정치체제에 대한 확실한 언급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유제 부인이라는 확실한 경제 원칙과는 달리, ‘아래로부터의 창의, 자주성, 운동의 자유, 에너지의 전개와 자발적인 중앙집권이라는 애매하고 이상적인 언급이 있다는 지적이 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그런 논리적 결함은 러시아의 공산주의 혁명 직후 불거져 나왔다. 공산주의는 어떤 정치제도를 가져야 할까? 초기 소련을 건국한 핵심 인물들의 머리를 아프게 한 논제였다. 그들도 민주주의의 장점은 알았던지 외형적으로는 민주주의처럼 보이는 이른바 민주집중제(Democratic Centralism)’를 고안해냈다. 혁명의 아버지 레닌의 작품이었지만, 그의 동지 트로츠키는 이 제도가 독재로 흐를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밑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의견을 수합 위로 그것이 수렴된다는 그럴듯한 논리로 포장됐지만, 현실은 모든 권력이 정치국 위원, 정치국 상무위원, 그리고 그 위에 존재하는 공산당 서기장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레닌은 러시아 전제군주제의 지배자인 짜르를 능가하는 권력을 향유할 수 있었다


원리상 그런 독재 권력을 유지하는 것은 정치 지도자들의 제일 목표일 수밖에 없다. 경제가 권력을 유지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면 독재 권력의 입장에서 그것을 마다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독재 권력의 반대 개념인 경제적 자유는 당연히 허용되지 않는다. 독재 권력이 공유제를 표방한 공산주의 경제체제와 어우러지며 역사상 유례가 없는 절대 권력이 만들어졌다. 경제적 자유를 박탈한 공산주의 경제체제가 독재 유지를 위해 대단히 유용한 수단이라는 점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왜냐하면 공유의 반대 개념인 소유가 없는 완전한 자유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자본주의 및 민주정치 연구의 결론이기 때문이다.


소련의 정치체제는 또 다른 모순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정치권력 승계 원칙의 부재는 체제의 심각한 결함이었다. 레닌이 죽은 후 모순은 현실화됐다. 원칙이 없으니 순조로운 권력 승계는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었다. 레닌 사후 피의 권력 투쟁이 적나라하게 펼쳐진 이유를 알 수 있다. 결국 공산당 독재, 공산당을 지배하는 소수 정치 지도자 중심의 과도한 권력 집중, 권력분립 부재 시 피하기 힘든 권력 투쟁 등은 그 후 두고두고 공산주의가 해결하기 힘든 난제가 됐다. 문제는 그런 전통이 소련 멸망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3. 중국 정치의 딜레마


초기 중국 공산당 정치체제는 소련의 그것을 사실상 그대로 모방했다. 레닌과 비슷하게 마오쩌둥이라는 엄청난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가 권력을 사실상 독점했다. 하지만 이 절대권력 체제도 완전하지는 않았다. 마오 집권 시기에 발생한 대약진 운동와 문화대혁명을 통해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이 이미 벌어졌기 때문이다. 권력투쟁의 피해자였던 덩샤오핑을 비롯한 이른바 주자파가 1978년 권력을 잡은 후, 이들이 마오 시절과는 다른 노선을 선택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바로 이것이 덩샤오핑 개혁·개방 정책의 배경이다. 반복되는 논제지만, 새로운 경제 노선에 걸 맞는 정치체제 구축 문제가 소련 지도자 레닌의 경우와 비슷하게 불거졌다


덩샤오핑의 고민은 지나친 권력집중 방지, 공산당 내부의 견제와 균형, 그리고 권력의 규칙성 확립으로 귀결됐다. 먼저 임기제를 도입, 권력 집중과 남용의 핵심 요인인 장기집권을 방지했다. 67세면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이 될 수 있지만 68세 이상이 되는 간부는 은퇴해야 한다는 칠상팔하(七上八下)’ 원칙은 대표적이다. 다른 직책에도 연령 제한과 임기제가 도입됐다. 그다음의 고안품은 파벌을 통한 권력의 견제와 균형이었다. 지금은 익숙해진 태자당파, 공청단파, 그리고 상하이방이 형성됐고, 정치국 위원과 상무위원의 숫자는 이들 파벌에게 엇비슷하게 배분됐다. 최고 권력의 승계 원칙도 만들어졌다. 현 최고 지도자가 차기 지도자가 아닌 차차기 지도자를 정한다는 격세지정(隔世指定)의 원칙을 의미한다.

중국학자 후안강(胡鞍鋼)은 덩샤오핑이 설계한 집단지도체제가 있었기에 중국의 정치가 안정돼 경제가 발전할 수 있었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문제는 이와 같은 체제가 유지될 수 있는가였다. 세월이 지나자 권력의 속성이 그러하듯 권력을 쟁취하고 유지 및 확대하려는 시도가 재현됐다. 정치국 위원 보시라이의 숙청, 정치국 상무위원 저우융캉의 처벌 등은 다시 재개된 적나라한 권력투쟁을 보여준다. 마오 시절에는 돈이 배제된 채 주로 정책의 실패 여부 혹은 이데올로기 등이 권력투쟁의 도구였지만, 개혁·개방 이후의 권력투쟁에는 예외 없이 돈이 개입됐다. 개인의 재산 축적이 가능해지자 부패가 만연했고, 이 개인적 부패가 정적을 처벌하는 도구로 활용됐던 것이다.


위의 권력투쟁은 시진핑의 등극과 권력 확장 과정에서 주로 불거졌다. 아무튼 덩샤오핑이 만든 새로운 정치체제, 즉 견제와 균형은 유지될 수 없다는 점이 상대적으로 분명해졌다. 시진핑 집권 시기 공청단파와 상하이방의 가시적인 위축, 시진핑의 군부 장악, 주석직 연임 제한 철폐, 시주석 사상의 당장 삽인 등은 덩샤오핑이 만든 권력구도가 사실상 붕괴됐음을 보여준다. 문제는 그러한 1인 중심 권력 강화와 집중이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냐는 것이다.

 


4.
중국의 경제·정치 마찰과 홍콩



1978년 중국의 개혁·개방 원칙은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경제활동에 인센티브제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능력을 더 발휘하면 돈을 벌 수 있고, 그 돈은 개인의 것이라는 원칙을 의미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시장과 자본이 필요했다. 시장원리 도입과 사유제 인정이 개혁이었다면 외국자본의 적극 유치는 개방이었다. 경제적 번영을 위해서는 경제영역에 대한 권력의 자의적 개입이 최소화돼야 하지만, 개혁·개방 이후 경제에 탄력이 붙은 상황에서 성장 지상주의가 지배한 정치권은 방해 요인이 아니었다. 또한 투자를 통해 성장을 견인하는 초기 고속성장 모델에서는 투입 여부가 문제가 될 뿐 권력 행사의 과다는 별 쟁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환경에서도 여전히 공산당 일당 독재를 특징으로 하는 중국의 경제·정치 부조화는 피할 수 없었다. 경제성장을 통해 축적된 민주화 요구가 분출된 1989년의 천안문 사태는 이를 대변한다. 당연히 어디까지 자유를 허용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불거졌다. 그러나 중국 당국은 이 핵심 논제에 대한 해결책 없이 대중의 욕구를 억압하는 방식에 의존 경제성장에만 전념했다. 문제는 경제 법칙상 억압적 압축 성장은 자본의 한계효율 저하 때문에 필연적으로 꺾이게 된다는 사실이다. 더 좋은 기술이 절실해지는 시점인데,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경제활동의 자유 증진이 필요하다. 즉 경제의 유연성을 확대하여 메커니즘 상 생산성을 높이는 방안이 절실해진다. 아울러 사회 전체가 자유화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창의적인 사고가 발현하는 가운데 과학과 기술이 발전해야만 한다.

시진핑 시절에는 위의 경제
·정치 발전 원리가 무시된 셈인데, 결과는 경제 유연성의 퇴보와 경제발전 부진으로 나타났다. 경제 부진이 야기할 수 있는 사회 동요 혹은 정적들의 도전 등을 극복하기 위해 권력은 오히려 강화됐다. 바로 이것이 현재 중국이 지니고 있는 경제·정치 모순이다. 이런 그림에 홍콩 사태를 대입해 보면 중국 본토의 억압 정치가 홍콩으로 연장되지 말라는 법을 발견하기는 힘들다.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될 시 약속한 기존 홍콩 시스템의 유지는 홍콩인에 의한 지배를 의미하는 항인치항(港人治港, Rule by Hong Kong People)과 한 나라에 두 제도가 공존한다는 일국양제(一國兩制, One Country, Two Systems)가 실천됨으로써 가능하다.

특히 중요한 것은 홍콩의 자치 권력이 홍콩인에 귀속돼야 한다는 항인치항 원칙인데
, 이것이 없이는 양제가 유지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홍콩 행정수반에 대한 홍콩인 직선제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홍콩인들의 저항이 2014년 홍콩의 우산혁명이었던 것을 보면 자치 권력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자치가 허락되지 않아 문제점이 잠복한 상태에서 정치성이 농후한 송환법 입법이 자행되자 올해 또 다시 대규모의 시위가 발생했던 것이다. 시진핑은 20133월 주석으로 등극했다. 반부패 운동을 적극 주도하며 정적들을 제거하는 가운데 시진핑의 1인 권력은 강화됐다. 본토에서의 권력 강화 움직임과 홍콩 사태는 과연 관련이 없을까? 시진핑의 권력 행사가 가시화되는 것과 시기적으로 일치하며 2014년 홍콩의 정치적 자치를 부인하는 중국 당국의 결정이 이루어졌다(‘홍콩 특구에 대한 일국양제 실천백서’). 논리 상 홍콩 자치는 중국의 경제·정치 구조에 비추어 시진핑이 수용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던 셈이다.
 


5. 홍콩 사태와 중국 당국의 어려움

홍콩 자치의 허용이 중국 전체에 미칠 영향은 심대할 수도 있다. 우선 대만에 대해 일국양제를 수용할 테니 대만은 중국 품으로 들어오라는 중국의 기존 주장은 설득력이 있을까? 인터넷 등 거의 모든 언론 매체를 철저히 통제하며 중국인들의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욕구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는 중국의 현 상황은 홍콩의 자치가 허용되는 경우에도 지속될 수 있을까? 분리 독립 운동이 지금도 진행 중인 신장 위구르 지역과 티베트에 대한 홍콩 사태의 영향력은 어떻게 통제할 수 있을까 등 다양한 질문이 가능하다.

문제는 홍콩 사태가 송환법 철회 정도로는 해결될 가능성은 낮고, 홍콩의 반중 시위는 지속 혹은 반복될 가능성이 오히려 높다는 사실이다. 중국이 군대를 동원 과거 천안문 사태 때와 같이 진압하면 문제는 끝날 수 있다. 그러나 세월은 변해 그때처럼 할 수 없는 현실에 중국 당국의 딜레마가 존재한다. 홍콩에 대한 무력 진압은 서방 강국들에게 대중 간섭의 빌미를 줄 것이고, 그것은 중국에 대한 총체적 경제제재로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홍콩 문제에 대한 확실한 해결책을 중국 당국이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을 아는 데는 무리가 없다. 앞서 소개한 중국 경제와 정치의 마찰이 현재도 지속되고 있는 것은 물론, 원리상 두 분야의 괴리는 더욱 커지고 있다. 바로 그와 같은 취약한 중국 본토의 시스템이 그대로 방치된 채 홍콩이라는 뇌관을 제거할 수 없다는 점은 중국 당국의 입장에서는 곤혹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바로 이것이 홍콩 사태와 중국 경제·정치 체제의 모순이다.